전통의학

제1장 전통시대의 의료제도와 의학관

전통시대의 의료제도

우리나라 전통의학은 선사시대부터 제의적ㆍ주술적인 형태로 시작되었다. 석침 골침 등의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의료적 행위가 추측되지만 본격적인 발달은 삼국시대부터였다. 고구려에는 왕을 모시는 시의(侍醫)가 있었고, 백제에는 전문보건의료기구인 약부(藥部)와 함께 의박사(醫博士), 채약사(採藥士)가 있었다. 통일 후의 신라에는 의료기관인 약전(藥典)을 중심으로 공봉의사(供奉醫師) 공봉복사(供奉卜師) 국의(國醫) 등의 직제와 교육기관으로서 의학(醫學)이 설치되었다. 

이미지 없음

고려시대에 들어 질병에 대한 인식과 치료능력이 크게 발전하여 의료기구의 정비가 진행되었다. 중앙에는 왕실의 건강증진과 질병치료를 담당하는 전의시(典醫寺)와 어용 보건의료기관인 봉의서(奉醫署)가 있었으며, 서민들을 위해 혜민국(惠民局)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 제위보(濟危寶) 등이 설치되었다. 이외에도 국왕의 식사를 담당했던 식의(食醫) 왕세자의 건강과 보육을 책임지는 약장랑(藥藏郎) 등의 관직이 있었다. 지방의 주(州) 부(府) 현(縣)에는 약점(藥店)을 설치했으며 신라의제도를 잇는 의학교육제를 실시하면서 과거를 통해 의사를 선발 육성하였다. 

이미지 없음

조선시대에는 삼의사(三醫司) 제생원(濟生院) 활인서(活人署) 등의 의료기관이 있었다. 삼의사에는 국왕과 왕족의 질병을 치료하는 내의원(內醫院) 관료를 돌보는 전의감(典醫監) 필요한 약재를 전매하고 백성을 치료했던 혜민서(惠民署)로 구분되었다. 제생원은 빈민 실업자 행려병자 기아 고아 등을 치료하였는데 이후 혜민서로 통합되었다. 활인서는 고려의 도서대비원을 잇는 의료기관으로 일반 백성의 치료와 구휼을 담당하였다. 이외에도 감옥 군대 등과 같은 특정 관서에도 의원(醫員)이 파견되었으며, 지방의 각 도에는 의원(醫院)이 설치되었다. 

이미지 없음

장부도에 나타난 전통의학관

우리 전통의학은 고대 중국의의학을 받아들여 이미 고려~조선초기에 향약(鄕藥)으로 불릴 만큼 독자적으로 발전하였고, 조선중기 허준의『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동의학(東醫學)으로 정립되었다. 근대 서양의학이 들어오면서 전통의학은 한의학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양의학과 전통의학은 인체에 대한 의학적 시각의 차이가 있다. 서양의학에서는 죽은 사람의해부를 통해 얻은 신체 구조와 장기에 대한 지식이 살아있는 사람의 치료와 병증 적용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있어 해부학의 발달로 이어졌다. 반면에 동양의학은 유교의 영향으로 기(氣) 혈(穴) 정(精)의 개념을 중시하여 해부 자체를 금기시하였기 때문에 해부학적 지식보다는 장기의 기능과 상호관련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이미지 없음

『동의보감』의 신형장부도(身形臟腑圖)는 해부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정(精) 기(氣) 신(神)과 오장육부(五臟六腑)의 상호관계를 그린 개념도이다. 중국에도 상세하고 정교한 해부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 의사들은 그다지 중요시 하지 않았다. 인체에서 정(精) 기(氣) 신(神)이 어떻게 생성되고 운행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이지 오장육부의 생김새나 구조는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질병의 발생도 사람의 기력이 약해져 생긴 생리적 부조화 때문으로 여겼기 때문에, 치료도 병균의 제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인체의 상호 연관관계를 고려하여 저항력을 기르는데 중심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