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의 등장

제3장 새로운 의료기관 병원의 등장과 전개

새로운 의료기관 병원의 등장

새로운 의료기관으로 등장한 병원은 산업화의 산물로 창설된 서양과는 달리 19세기 말엽의 문호개방과 함께 서양의료제도의 도입과정에서 설립되었다. 1976년 일본과 국교가 확대되면서 개항지를 중심으로 서양식 일본인병원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1877년 부산의 제생의원(濟生醫院)을 비롯하여 1880년 원산에 생생의원(生生醫院)이 생겼고 1883년 인천에 인천일본영사관부속의원(仁川日本領事館附屬醫院, 인천일본의원)이 설립되었다. 일본인의 서양식 의료기관은 조선인도 치료했지만 일본거류민의 치료가 주목적이었고 친일감정의 조장과 근대문물의 우수성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세워진 것이어서 우리 근대병원의 시초로 볼 수는 없다.

1855년 4월 10일 미국인 선교의사 알렌에 의해 최초의 근대식 병원 광혜원(廣惠院)이 설립되었다. 이후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바꾼 제중원(濟衆院)은 조선정부가 건물과 인력을 제공하고 미국 선교부와 선교의사가 진료서비스를 관장하는 형태로 운영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북장로교파 선교회 소속이 되었다. 이와 같이 1885년 이후 전국 각지에는 여러 기독교 교파의 선교병원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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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조선정부는 관립의학교(官立醫學校)와 내부병원(內部病院)을 설립하여 근대 서양의술을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내부병원은 광제원(廣濟院)으로 개칭되었다가 의학교와 1905년 설립된 대한적십자병원과 함께 1907년 대한의원(大韓醫院)으로 통합되었다.
근대병원의 등장에 따라 조선의 보건의료체제는 크게 변화하였고, 현대의 중요 병원들은 이 시기에 설립되었던 관립병원, 일본인병원, 서양선교병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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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의 병원과 의학교육제도

1910년 일제시대의 의료행정은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위생과에서 담당하게 되었고, 병원은 운영주체에 따라 관립병원, 공립병원, 사립병원으로 운영되었다. 대한제국이 설립하였던 대한의원(大韓醫院)과 각 지방의 자혜의원(慈惠醫院)은 모두 일본총독부 소속의 관립 또는 공립병원으로 운영되었다.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경성제국대학부속병원으로 바뀌었다. 1909년 청주와 진주를 시작으로 지방에 설치되었던 자혜의원은 1925년 도립의원 체제로 변경 운영되었으며 지방민의 치료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병원의 의사와 주요직은 일본인으로 채워져 일제의 시혜정책을 선전하는 역할 수행하였다.

사립의 선교병원과 한국인 개업병원은 일제의 심한 통제와 억압으로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과 외국인 추방으로 선교의사들이 입국제한과 출국조치를 당해 선교병원의 의료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한국인 의사들은 사립병원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자 주로 개인의원을 설립하였고, 민간병원 설립은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1941년 순수 민간병원인 백외과의원(白外科醫院)이 창립되었다. 1932년 우에무라외과의원을 인수하여 위탁운영을 하다가 1941년 4월에 백외과의원으로 개원하였으며 1946년 우리나라 최초로 개인병원을 재단법인화 하였다. 1907년 대한의원 교육부(敎育部)로 흡수되었던 관립의학교(官立醫學校)는 의육부(醫育部) 부속 의학교로 명칭이 거듭되다가 1910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16년 4년제의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알렌에 의해 의학교육을 시작했던 제중원의학교는 1909년 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학부(學部: 지금의 교육부)에 정식으로 등록하였으며 1922년 4년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교 의학부과 설립되었고 1928년 대구의학전문학교 1929년 평양의학전문학교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1944년 광주와 함흥에 의학전문학교과 각각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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